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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1.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2.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3.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4.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5.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6. 주께서 왕에게 장수하게 하사 그의 나이가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7.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8.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 묵상도움글 ]

시편 61편은 성경 학자들이 다윗이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였을 때,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하여 마하나임으로 피난을 갔을 때, 쓴 시라고 해석합니다.  다윗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구절 구절 다윗의 심정이 드러납니다.2절에서 “내 마음이 약해질 때” 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겪는 어려움은 단순히 육신의 고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음이 무너진 고통이었습니다. 상황과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도 마음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그는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대수롭지 않은 문제라도 마음이 무너지면 다 무너진 것입니다. 다윗은 “땅 끝에서 주님을 부릅니다” 라고 기도합니다. 땅 끝이란 “이젠 끝에 이르렀다. 이젠 마지막이다” 라는 말입니다. 절망이라는 말입니다. 마음이 무너진 사람이 흔히 이런 표현을 씁니다.그런데 다윗이 이처럼 마음이 무너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동안 영원하리라,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의지하던 것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왕이었습니다. 세상에 왕의 권세보다 굳건한 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 순간에 흔들려 무너졌습니다. 그는 압살롬의 아버지였습니다. 세상에 아버지를 반역하는 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어떻게 합니까?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다윗은 비로서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왕이라는 권세,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그런 것들은 결코 믿고 의지할 것이 못되는 것이었구나! 고통 가운데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놀라운 기도를 드립니다.“2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다윗은 비로서 자신이 정말 믿고 의지해야 할 대상이 따로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바위’입니다. 그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터를 말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입니다.다윗이 위대한 것은 고통 중에서 이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믿고 의지하였던 것이 무너졌을 때, 즉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하나님 만이”, “오직 하나님” 만이 진정한 피난처시요, 견고한 망대요 장막이고 덮는 날개임을 기억한 것입니다. 왕? 아닙니다. 아버지?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다윗이 이것을 몰랐을까요? 너무나 잘 알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게 되자 다윗의 고백이 갑자기 달라졌습니다.(5절) 다윗에게 평안이 왔습니다. 담대해졌습니다. 다시 소망이 넘쳤습니다. 다윗이 바위 위에 선 것입니다! 여전히 상황과 형편이 달라진 것이 없지만 모든 것이 달라진 것입니다.다윗의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었습니다.(6,7절) 그리고 앞으로 오직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만 노래하며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기로 서원합니다.(8절)우리도 다윗 처럼 ‘높은 바위’ 위로 올라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높은 바위는 우리 힘으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다윗은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라고 했습니다.그러나 두려워하고 낙심하지 않을 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복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높은 바위 위에 서는 은혜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마음에 주요 왕으로 영접하면 반석 위에 선 자가 됩니다.여러분, 만약 건강이나, 재산이나, 직장이나, 믿었던 사람이 떠나감으로 슬퍼하고 낙심하고 괴로워한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너져야 할 것이라면 하루 빨리 무너져야 합니다.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지하고 살았다면 하루빨리 청산하는 것이 잘된 일입니다.   탄식하고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슬퍼만 하지말고 다윗이 기도한 대로 “결코 흔들리지 않는 높은 바위 위로 나를 세워주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 복음메세지 ]

예수님의 부활 직전의 분위기도 너무나 무거웠었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제자들이 다시 일어나기까지 과정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모든 것이 다 멈춘 것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숨죽이고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지만 마음에는 슬픔만 가득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 직전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분위기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은 분일 뿐입니다. 함께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그러나 변화가 일어납니다. 여기저기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증언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마리아, 그리고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셨을 때의 제자들처럼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인생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그러나 이런 사람은 아직 소수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살아계시더라,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시다.” 들어본 수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만나 본 것은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마음이 터질 것 같이 뜨거웠지만, 아직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가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 뿐 아니라 온 예루살렘이 뒤집어졌습니다, 이젠 불신자들도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인 개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 정도가 아니라 교회가 성령 충만을 받는 일이 주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 주위가 주님을 알게 됩니다. 교회에 성령이 임하였다고 해서 아직 끝이 아닙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예루살렘은 들끓었지만 전 세계는 여전히 조용했습니다, 요엘 선지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예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역사는 이 예언의 성취 과정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집니다, 만민에게 성령이 부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더 깊이 더 풍성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실패했다고 절망하거나 주저앉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이 에돔과의 전쟁에서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기 전에 심히 어려운 처지에 빠졌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실패자를 찾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는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승천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오셔서 다시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실패하고 배신한 제자들을 용서하실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 다시 주의 사도로 쓰신단 말입니까?그러나 예수님께 다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계획은 성령님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일은 오직 제자들 안에 오신 성령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은 너무나 준비된 사람입니다. ‘내 힘으로는 안된다! 결심으로도 안된다!’라는 좌절 속에 주 예수님 바라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님을 사모하고 갈망하고 기다리고 오직 순종할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을 찾으십니다.두려운 가운데 믿음이 생기고, 위로가 느껴지고, 순간이라도 평안이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제게 오세요, 저를 만나주세요.” 하고 기도만 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주님! 환영합니다 주님!” 하고 이미 함께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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